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이 있습니다.
또 죽기 위해 태어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사실 이 불확실한 삶 속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가장 확실한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도 말했습니다.
인간은‘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잘 살기 위해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항상 죽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은
삶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우리의 삶, 생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곧 삶의 존재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 죽어야만 합니다.
불교에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生死一如’‘生死卽涅槃’라고 합니다.
살고 죽는 일이 다르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의식과정인 다비(茶毘)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여는 의식인 것입니다.
죽음이 미혹의 근저에 있는 무명의 티끌을 불살라버리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도정(道程)일까요?
<법구경>의 가르침처럼‘허공에 숨어도, 바다 속에 숨어도,
산중의 굴속에 숨어도 이 세상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덧없다’는 진리를,‘우리도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우리가 죽음을 그토록 회피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옛 선사들은 생사일여(生死一如)나 생사불이(生死不二)를 언급하며
초연한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써 있는 글귀입니다.
웰다잉(Well dying)은 ‘잘 살기’즉 웰빙(Well being)에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성찰과 반성은 현재의 삶을 훨씬 건강하고 의미있게 보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 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과연 잘 살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웰다잉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의 시작’입니다.
성경에서도 죽음의 중요성을 언급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결국 누구나 죽을 것이니 아직 생각할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한 순간의 즐거움만을 생각한다.’(전도서 7장 2 ~ 4)
죽는 것을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뜻입니다.
공자(孔子)의‘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는 물음은
이제‘죽음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삶을 알겠는가(未知死 焉知生)’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죽음을 알고 받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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