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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古叢林 方丈 慧草스님, 丙戌年 冬安居 結制 法語
지관
2006. 12. 7. 08:29
중국의 단하(丹霞)선사는 출가하기전 묵자(墨子)를 공부하여 구경(九經)을 통달한 유학자(儒學者)입니다.
어느날 방(龐)거사와 함께 과거시험을 보려고 낙양(洛陽)으로 가는 도중 행각(行脚)하는 스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 스님과 차(茶)한잔을 나누는 중 스님이 물었습니다.
“젊은 선비는 어디로 가시오?”
“과거를 보러갑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공부가 아깝습니다. 어찌 부처를 뽑는 곳으로 가지 않고 벼슬아치를 뽑는 곳으로 갑니까?”
“부처를 어디서 뽑나요?”
“강서(江西)에 계시는 마조(馬祖)선사께서 지금도 생존하시어 설법을 하시는데 이 설법을 듣고 도(道)를 깨친이가 아주 헤아릴 수 없이 많소, 그곳이 바로 부처를 고르는 곳이요.”
이 선비는 즉시 길을 떠나 마조선사를 찾아가 절하고 찾아온 연유(緣由)를 말씀드리니 마조선사가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남악(南嶽)으로 칠백리를 가면 석두(石頭) 장로(長老)가 계시는 총림(叢林)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출가를 하시오.”
이 선비는 곧바로 석두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여 후일 문수(文殊)의 화신(化身)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당대의 대선지식(大善知識)이 되었습니다.
총림은 할일없는 사람들이 모여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장소가 아니라 수행자들이 취두정진(聚頭精進)하며 부처를 뽑는 선불장(選佛場)입니다.
지난 해제(解制) 기간동안 우리 태고총림에서 일어난 불미한 일들은 부처를 뽑는 선불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사판(事判)의 일로 대중간에 불화하고 종단과 대립하는 등 불조(佛祖)의 교지(敎旨)와 승분(僧分)의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들이 수개월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음은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친출가(事親出家)하여 방포원정(方袍圓頂)하고 있는 까닭은 맹목(盲目)을 탈각(脫殼)하고 혜안(慧眼)을 얻어 바른 지견(知見)을 행하고자 합니다.
대주(大珠)선사는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화상에게 출가하였으나 후에 마조(馬祖)선사의 법제자가 된 분입니다.
하루는 어떤 행자가 대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한 생각을 통달하면 세계가 모두 부처요, 한 생각이 미혹하면 작은 티끌하나도 중생이니라.”
“어떤 것이 삿된 것(邪)이고, 어떤 것이 바른 것(正)입니까?”
“마음이 물건을 쫓으면 삿된 것이고, 물건이 마음을 쫓으면 바른 것이다.”
“어떤 것이 훌륭한 법(法)입니까?”
“자연(自然)을 알고 그 순리에 따르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참된 법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실상(實相)을 깨달아 사지(四智)가 원명(圓明)하신 분입니다.
중생의 깨달음이란 이미 부처님께서 깨달아 전하신 법(眞理)을 자신의 심식(心識)속에 체현(體現)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입니다.
부처님을 닮으려고 출가한 사람들의 음이 물건(物質과 名譽 등 世俗的價値)을 쫓는 삿된 생각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8세기경에 인도(印度)와 중국(中國) 사이에 있는 “티베트”에서는 티벳불교를 서로 지배하기 위하여 십법행(十法行:六婆羅蜜과 看經, 說法등)을 실천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여래선(如來禪)을 주장하는 인도스님과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장애(障碍)가 되므로 일체를 사유(思惟)하지 않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돈오(頓悟)의 조사선(祖師禪)을 주장하는 중국의 선승(禪僧)들 사이에 삼예사(三叡寺)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자리에 참석한 대중들이 “제법(諸法)의 본성(本性)을 여실이 분별하고 관찰하는 반야(般若)의 체득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인도스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국의 선승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습니다.
불교는 중도사상(中道思想)이 근본입니다.
여래선(如來禪)도 맞고 조사선(祖師禪)도 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신 후 제자들간의 수많은 사상논쟁(思想論爭)이 있어 왔습니다.
수행자의 원통(圓通)과 홍지(弘智)를 위한 산문(山門)의 사상논쟁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利潤)과 자리(席)를 위한 다툼은 없어야 합니다.
금년 동안거에는 대중이 심기일전(心機一轉), 분심(忿心)을 내어 가일층(加一層) 정진하여 각자의 본분사(本分事)를 반드시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自從靈鷲分燈後 (자종영취분등후)
直傳海東輝古今 (직전해동휘고금)
六祖禪風嫡嗣家 (육조선풍적사가)
勤學精進一不退 (근학정진일불퇴)
曠劫無明當下滅 (광겁무명당하멸)
脫下舊鞋着新靴 (탈하구혜착신화)
一曲彈琴奏月明 (일곡탄금주월명)
四海香風從此起 (사해향풍종차기)
영취산에서 갈라진 부처님의 법등이
해동으로 전해져 고금을 비추었네.
육조의 선풍이 흐르는 적손의 집안이니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광겁의 무명을 당장에 떨쳐내어
중생의 헌 신발을 여래의 새 신발로 갈아 신고
한 곡조 거문고 소리로 밝은 달을 노래하며
사해의 향기로운 법의 바람을 이 도량에서 일으키세.
太古叢林 方丈 慧草
어느날 방(龐)거사와 함께 과거시험을 보려고 낙양(洛陽)으로 가는 도중 행각(行脚)하는 스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 스님과 차(茶)한잔을 나누는 중 스님이 물었습니다.
“젊은 선비는 어디로 가시오?”
“과거를 보러갑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공부가 아깝습니다. 어찌 부처를 뽑는 곳으로 가지 않고 벼슬아치를 뽑는 곳으로 갑니까?”
“부처를 어디서 뽑나요?”
“강서(江西)에 계시는 마조(馬祖)선사께서 지금도 생존하시어 설법을 하시는데 이 설법을 듣고 도(道)를 깨친이가 아주 헤아릴 수 없이 많소, 그곳이 바로 부처를 고르는 곳이요.”
이 선비는 즉시 길을 떠나 마조선사를 찾아가 절하고 찾아온 연유(緣由)를 말씀드리니 마조선사가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남악(南嶽)으로 칠백리를 가면 석두(石頭) 장로(長老)가 계시는 총림(叢林)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출가를 하시오.”
이 선비는 곧바로 석두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여 후일 문수(文殊)의 화신(化身)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당대의 대선지식(大善知識)이 되었습니다.
총림은 할일없는 사람들이 모여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장소가 아니라 수행자들이 취두정진(聚頭精進)하며 부처를 뽑는 선불장(選佛場)입니다.
지난 해제(解制) 기간동안 우리 태고총림에서 일어난 불미한 일들은 부처를 뽑는 선불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사판(事判)의 일로 대중간에 불화하고 종단과 대립하는 등 불조(佛祖)의 교지(敎旨)와 승분(僧分)의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들이 수개월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음은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친출가(事親出家)하여 방포원정(方袍圓頂)하고 있는 까닭은 맹목(盲目)을 탈각(脫殼)하고 혜안(慧眼)을 얻어 바른 지견(知見)을 행하고자 합니다.
대주(大珠)선사는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화상에게 출가하였으나 후에 마조(馬祖)선사의 법제자가 된 분입니다.
하루는 어떤 행자가 대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한 생각을 통달하면 세계가 모두 부처요, 한 생각이 미혹하면 작은 티끌하나도 중생이니라.”
“어떤 것이 삿된 것(邪)이고, 어떤 것이 바른 것(正)입니까?”
“마음이 물건을 쫓으면 삿된 것이고, 물건이 마음을 쫓으면 바른 것이다.”
“어떤 것이 훌륭한 법(法)입니까?”
“자연(自然)을 알고 그 순리에 따르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참된 법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실상(實相)을 깨달아 사지(四智)가 원명(圓明)하신 분입니다.
중생의 깨달음이란 이미 부처님께서 깨달아 전하신 법(眞理)을 자신의 심식(心識)속에 체현(體現)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입니다.
부처님을 닮으려고 출가한 사람들의 음이 물건(物質과 名譽 등 世俗的價値)을 쫓는 삿된 생각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8세기경에 인도(印度)와 중국(中國) 사이에 있는 “티베트”에서는 티벳불교를 서로 지배하기 위하여 십법행(十法行:六婆羅蜜과 看經, 說法등)을 실천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여래선(如來禪)을 주장하는 인도스님과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장애(障碍)가 되므로 일체를 사유(思惟)하지 않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돈오(頓悟)의 조사선(祖師禪)을 주장하는 중국의 선승(禪僧)들 사이에 삼예사(三叡寺)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자리에 참석한 대중들이 “제법(諸法)의 본성(本性)을 여실이 분별하고 관찰하는 반야(般若)의 체득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인도스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국의 선승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습니다.
불교는 중도사상(中道思想)이 근본입니다.
여래선(如來禪)도 맞고 조사선(祖師禪)도 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신 후 제자들간의 수많은 사상논쟁(思想論爭)이 있어 왔습니다.
수행자의 원통(圓通)과 홍지(弘智)를 위한 산문(山門)의 사상논쟁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利潤)과 자리(席)를 위한 다툼은 없어야 합니다.
금년 동안거에는 대중이 심기일전(心機一轉), 분심(忿心)을 내어 가일층(加一層) 정진하여 각자의 본분사(本分事)를 반드시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自從靈鷲分燈後 (자종영취분등후)
直傳海東輝古今 (직전해동휘고금)
六祖禪風嫡嗣家 (육조선풍적사가)
勤學精進一不退 (근학정진일불퇴)
曠劫無明當下滅 (광겁무명당하멸)
脫下舊鞋着新靴 (탈하구혜착신화)
一曲彈琴奏月明 (일곡탄금주월명)
四海香風從此起 (사해향풍종차기)
영취산에서 갈라진 부처님의 법등이
해동으로 전해져 고금을 비추었네.
육조의 선풍이 흐르는 적손의 집안이니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광겁의 무명을 당장에 떨쳐내어
중생의 헌 신발을 여래의 새 신발로 갈아 신고
한 곡조 거문고 소리로 밝은 달을 노래하며
사해의 향기로운 법의 바람을 이 도량에서 일으키세.
太古叢林 方丈 慧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