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우유를 짜두었다가 장차 손님을 초대해서 접대할 예정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부터 미리 우유를 짠다면 날로 분량이 늘어나 담아둘 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패할 염려도 있고 그러니 차라리 짜지 말고 소의 뱃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손님을 초대할 때 한꺼번에 짜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암소와 수소를 붙잡아 각기 다른 곳에 매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잔치를 베풀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소를 끌어다가 젖을 짜려 했으나, 오랫동안 젖을 짜지 않은 탓으로 젖이 말라붙어서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혜 없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보시를 하고자 하는 경우에 흔히 이같이 말합니다. ‘재물을 크게 모아놓고 그다음 한꺼번에 보시를 해야겠다.’ 그러나 크게 모으기 전에 임금이나 재난이나 도둑에게 모두 빼앗긴다든가, 또는 그런 화를 면한다 해도 문득 죽게 되어서 보시할 겨를이 없어지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란 우유를 한꺼번에 짜려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과의 나눔은 어느 날 갑자기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꾸준히 작은 것부터 베풀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보다 큰 것을 많이 보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베품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됩니다.
나눔은 내 마음에 가득한 인색함과 삼독심과 이기심을 덜어주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순수하고 맑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나눔과 베품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색하고 욕심 많고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지 못합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색함과 욕심과 어리석음이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눔은 수행입니다. 나의 잘못을 고쳐 맑은 바탕을 드러내주는 것이 수행의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눔은 습관이 되어야 하며, 베품은 수행인 것입니다.
|